(7) 명분 쌓기
충길이네가 우리 집을 떠난 것은 새벽 세시가 넘어서였다.
다 떠난 뒤 나와 애들이 합쳐서 아내를 안방으로 옮기려 했을 때에야 아내는 눈을 뜨고 충길이네를 찾았다.
아내는 눈을 떴으면서도 내 목을 붙들고 그대로 안고 들어가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침대 위에 털썩 내려놓자 내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이를 지켜보던 애들이 민망하여 물러갔다.
"아깐 정말 미안했어요?"
"당신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뭘...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그래도 오늘 당신이 주인공이잖아요!"
"덕분에 제수씨와 춤 한번 잘 추었잖아..."
"뚱보 나보단 낫죠?"
"질투인가?"
"질투는? 할망구가 다 된 나이에...."
"준호네도 걱정이 있더라.."
"나도 들었어요. 당신과 꼭 같은 거더만요."
"그래, 나는 충길이 놈은 괜찮으리라 여겼는데..."
"글쎄 말예요. 우리도 어지간히 산 모양이유.."
"좋은 방법이 없을까?"
"당신처럼요..?"
그녀는 알고 있는 듯 했다.
여자의 육감은 무서운 거다.
"내가 왜?"
"당신 준호 엄마와 하고 싶어하잖아요!"
"..................................!"
"준호 아빠도 그럴까요?"
"글쎄............?"
나는 충길이를 살리는 데 당신이 나서줄 수 없겠냐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우린 그 이야기를 끝으로 오랜 침묵 끝에 잠이 들었다.
작금 양가에 불어닥친 시련은 생각보다 침울한 위기의식을 안겨주고 있었다.
어쩌다 위기를 넘긴 듯한 나도 언제 침몰할 지 모를 함선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의식을 버릴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사무실로 나갔을 때 선이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아뿔사 그녀에게 키를 주는 걸 잊었다는 생각에 언제서부터 기다렸냐고 물었더니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고 말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말자 내 서랍에 든 키 묶음에서 한 세트를 내어주자 호주머니에서 꺼낸 열쇠고리에 주렁주렁 달았다.
자랑스런 모양이었다.
집에서 들고 온 커피포트를 건네주며 한잔 끓여 보라 했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범을 보이는 셈치고 내가 끓여야 했다.
"아빠. 어제 파티 즐거우셨어요?"
"또?"
"아, 사장님!"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딸을 못 키워본 나로선 그녀의 모든 행동이 그저 귀엽고 깜찍할 뿐이었다.
더구나 누이동생조차도 없이 자란 나라서 더하리라...
"요건 요만큼, 요건 요만큼.."하며 끓인 물에 커피를 타는 법을 가르치는 데 팔꿈치에 와 닿은 그녀의 몰캉한 가슴살이 느껴졌다.
"자, 요거 미스 정 마셔 보고 내 잔도 한잔 타 봐?"
그녀는 마냥 즐거운 듯이 티스푼으로 내가 한 대로 커피를 타 와서 내 앞에다 밀었다.
나는 그걸 마시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도 자신의 잔을 마시다가 또 한번 머리를 쳤다.
사무실에 딸린 화장실로 쪼르르 뛰어 들어가더니 걸레를 짜들고 나와선 책상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밤새 날아온 전문을 뒤적이며 그 모습을 은근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을 닦다가 내 눈과 마주쳤다.
나는 무안하기도 하여 눈을 찡긋 했더니 그녀도 찡긋해 보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 감정이 계속된다면 오래 못 버티고 내가 먼저 무너지고 말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불러 앉혀 놓고 전화가 올 때는 내 핸드폰 전화를 가르쳐 주고 어느 회사의 누구인지 적어놓아라 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혼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데에 난감해 하는 표정였으나 앞으로 그럴 시간이 더 많을 것이므로 미리 훈련시켜야 할 일이기도 했다.
막상 나오긴 했지만 갈 데라곤 막연했다.
충길이도 출장을 떠나고 없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차에 올랐다.
꽁꽁 닫친 차안은 찜통이었다.
나는 창문을 모두 내리고 에어컨도 틀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어디로 가서 시간을 보내어 볼까?
선이가 없을 땐 필요 없던 근심거리가 생긴 꼴이었다.
그녀를 들인 게 잘한 일일까 따지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시내 한복판의 젊은애들을 중심으로 한 스넥식 식당이었으므로 손님은 별로 없었다.
방학중이라 아무래도 비수기인 셈이다.
개업할 때 와 보곤 처음이라서인지 아내는 웬일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냥 시간도 좀 있고 해서... 그런데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 인건비라도 빠지나?"
"사돈 남 말 하네요. 하긴 당신은 이제 날개를 달았으니..."
"허- 내가 괜히 왔네.."
"일로 앉아요. 당신 안 피곤하세요?"
그때에야 의자를 내어주며 앉아라 했다.
빙 둘러보니 구석구석 붙어 있는 장식품들이 꼭 아기들 방 같았다.
아니, 소녀들의 방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주로 중.고등 학생들이 들리는 곳이니 당연한 장식이리라..
갑자기 선이를 이곳에다 아르바이트시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전문학교 다니는 여학생을 타임으로 들였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안 보이네?"
"방학이라 보냈어요. 방학 끝나면 또 부를 거예요."
"우리 애들을 시키면..?"
"그 덜렁이들을.. 하루도 못 베길 걸요. 접시나 깨고..."
"당신 자식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냐?"
"저도 생각 안한 게 아네요. 하지만 왠지 싫었어요..."
아내가 그 말을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집은 가난하여 장녀인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의 학교는 물론 동생들의 학교도 마치게 했다.
그런 아픈 과거사를 자식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선이 이야기를 꺼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사무실에 여직원 들였어!"
"언제요?"
"어제 데려와 오늘부터 근무시켰어."
"그럴 때도 되었지요. 이때껏 혼자 버텨 왔는데 말벗도 되어주고.. 남자가 걸레 들고 설치는 일도 없을 테고...."
아무튼 다행이었다.
"당신에게도 한번 보여줄 게?"
"호호.. 그렇게까지야.. 암튼 축하해요!"
"별 걸로 다 축하 봤네, 그려. 하지만 당신도 좋아 할 거야! 애가 참해!"
"어련히 알아서 했을라고... 그런데 그만큼 참하다면 내가 질투내면 어쩔래요?"
"두 여자 속에 낀 행복이나 누리지 뭐.. 껄껄껄..."
나는 그쯤에서 일이 바쁘다며 그곳을 나왔다.
들어갈 때는 한가하다 했다가 바쁘다 하고 나왔으니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신경 쓰지 말자고 맘을 비웠다.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책방에 들러 책 몇 권을 샀다.
왜 이렇게 빨리 다녀오느냐는 표정의 그녀 앞에 책을 내밀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테니 그때마다 책이나 읽어!"
"사장님! 딱 한번만 아빠라 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의자 옆으로 다가오며 "아빠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며 내 볼에다 입술을 콕 찌르고 물러갔다.
내 볼은 여지없이 감전되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내 앞에서 등을 보인 상태로 그 책들을 뒤적이다 그 중 한 권을 읽는 모양이었다.
내가 골라온 책은 채근담의 글처럼 마음의 수양을 닦는 수필집 한 권과 그녀 같은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시집 한 권, 그리고 유머집. 그렇게 세 권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중 유머집부터 보는 모양이었다.
책을 읽으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가지런한 까만 머리칼 밑으로 뽀얗게 드러난 목살이 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뒷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거기는 사무실에 딸린 조그만 베란다였다.
전에 세 들었던 이들이 박았던 못 자국들이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있었고 쓰지 않아 하얗게 먼지만 쓰고 있는 보일러도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기거하며 가스통까지 설치하여 밥도 해 먹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기는 화장실 옆쪽에 방도 있었다.
나는 지금 그곳을 납품자재를 쌓아두는 창고로 쓰고 있었다.
입에 문 담배를 비벼 껐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자재창고의 문을 열었다.
"미스 정 이리 와봐!"
"왜요?"
"너 여기서 살면 어떻겠니?"
"여기서요?"
자재가 꽉 들어찬 그곳을 보며 그녀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여긴 원래 방이었어. 이런 것들 다 치우면 방이 되지. 보일러도 깔려 있다고...?"
"그렇지만..."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야. 일단 휴가 다녀와서 이 자재들은 뒤쪽에 있는 창고를 얻어 모두 치우고 방으로 꾸며 놓을 테니까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아..."
"사장님이 그러시라면...."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까만 눈망울로 내가 좋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표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내 가슴으로 콩닥콩닥 뛰는 그녀의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나는 우리 선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거야! 또 그러고 싶어!!"
"저도요...!"
우리가 포옹을 풀은 건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그녀가 쪼르르 뛰어가 전화기를 들었다.
"네, 윤수산업입니다. / 계신데 누구시죠? / 아, 몰라 뵈었습니다, 사모님! 곧 바꿔드릴게요!"
아내인 모양이었다.
"난데, 왜?"
"여보 점심 사줘요! 나 문 닫았어요..."
"벌써..?"
"날도 더운데 파리만 날리고.. 몸도 피곤하고.. 그리고..."
"알았어! 내 곧 그리로 가마."
"여보, 내가 가면 안 될까요?"
"알았어! 알아서 데리고 갈 테니 거기서 기다려!"
아마도 새 아가씨가 궁금하여 못 견딜 지경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질투한다고 보진 않는다.
다만 우리만의 城에 해방꾼이 아닐지 보고싶을 것이다.
선이도 사태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미스 정 밥 먹으러 가자! 내 마누라 앞이니 실수해선 안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듬었다.
그녀를 태우고 아내에게 가면서 별 말은 해주지 않았다.
아직 철없다지만 자신의 앞가림쯤은 할 줄 아는 애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죄를 고해성사 받으러 가는 기분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내의 식당이 가까워지자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긴장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차가 서고 아내가 내 차를 알아보고 걸어 나오자 그녀는 차에서 내려 아내에게 꾸벅 절을 했다.
의외로 아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울 그이 많이 도와주세요!"하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자 안심이 된 듯이 뒷문을 열어주며 먼저 오르게 한 뒤 같이 뒷좌석에 앉았다.
"우리 냉면 먹으러 가지?"
"좋아요!"
나는 다시 차를 몰며 룸미러를 보자 둘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곧 냉면 집 앞에 그들을 내리고 안에다 차를 대고 나도 합세했다.
둘이 미소까지 지은 모습을 보니 벌써 뭔가 통했나 보다 느꼈다.
둘을 맞은 편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시켜야지?"
"벌써 시켰어요. 당신 물냉면 할거죠?"
"응!"
"우린 비빔 시켰어요."
"벌써 따돌리네...!"
그러나 내 말은 안도의 소리였다.
아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유선이는 어떻게 알고...?"
"언니 집에 놀러 왔다가..."
말까지 놓는 걸 보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물은 다음 말에 나는 긴장했다.
"부모님도 알아?"
"전 부모님이 안 계셔요."
"저런... 쯧쯧...!"
선이는 의외로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런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올해 몇이지?"
"열 일곱이에요!"
"그럼 아직 학생이겠네?"
"그만 뒀어요. 제가 학교 다 다닐 처지도 못 되고.. 꼭 학교를 나와야 좋은 일 한다고 여기지 않기에 제 소신껏...."
"생각보다 너 어른스럽구나!"
아내는 내 얼굴을 쳐다봤다.
잘 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이런 철부지를 데려다 앉혔느냐고 핀잔하는 걸까?
곧 냉면이 나왔다.
냉면 그릇과 함께 놓여진 가위를 내가 들었다.
그녀가 그걸 들고 잘라주는 경박함을 아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냉면을 먹을 때 그 아무도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젓가락을 놓으며 아내가 물었다.
"너 이 땡보 아저씨한테 월급은 얼마나 받기로 했니?"
"주시는 대로 받기로 했어요. 전 아직 아르바이트생이니까요!"
"그래도 그건 그러는 게 아니다. 너 그러다 차비도 안 되는 돈을 주면 어쩌려고...?"
"설마... 그래도 한달 후 지켜봐야지요. 후후..."
"아무래도 당신 이 아가씨한테 백지수표 뺏길 거 같은데..? 호호호..."
"하하하.."
나는 허탈하게 웃긴 했지만 아내의 말속에 뼈가 있음을 느껴야 했다.
택시를 잡아 아내를 태워 보내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녀에게 잘 했다고 말했다.
사무실에 가까워질 무렵 그렇게 무덥히던 하늘에서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차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의 거센 소낙비였다.
윈도우브러시를 최대로 올렸건만 10m 앞이 채 안 보였다.
나는 도로를 기다시피 하여 겨우 사무실 옆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었다.
둘은 내릴 용기를 못 내고 멍하니 차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만 보고 있었다.
어쨌든 그간의 무더웠던 체증이 다 씻겨 내리는 거 같아 속은 후련했다.
그런데 먼저 용기를 낸 건 당돌한 그녀였다.
문을 열자마자 비를 뚫고 철벅철벅 뛰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사무실을 향해 뛰었다.
그 짧은 거리임에도 내 와이셔츠는 온통 젖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의 서로를 보고 히죽 웃었다.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도 뒷 베란다로 나가 와이셔츠를 벗어 물기를 짰다.
넌닝도 벗어 짜야했다.
물기를 대충 턴 와이셔츠만 입고 돌아 왔을 때 전화벨이 울고 있었다.
송다방의 미스 한이었다.
"미스 정 전화 받아?"
"누구세요?"
"미스 한!"
"좀 있다 건다 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 전했다.
걔는 저 안에서 뭘 할까?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창 밖으론 아직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아내였다.
집에 도착했다면서 비 안 맞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했다.
애는 참한데 아직 어린 게 마음에 걸린다며 자세한 얘기는 집에서 하자며 끊었다.
충길이도 하던 말이었다.
나의 시선은 자꾸 화장실 쪽으로 갔다.
안에서 우두둑 물소리까지 들리는 걸로 보아 그 안에서 아예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 아랫것이 서 있다는 건 안 만져봐도 느낄 수 있었다.
한 차례 고비를 넘긴 그것이 심한 갈수기에 단비를 만난 듯 요즘 들어 부쩍 시도 때도 없이 융기하는 모습이 생경했다.
어쩌면 마지막 불꽃을 예고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다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늪으로 모습을 감춰버릴 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긴 연기 너머로 정신없이 쏟아져 내리며 유리면을 핥고 있는 빗물이 보였다.
저처럼 우리도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다 옆에 타고 내리는 빗물에 엎쳐지고 강물에 휩쓸려 결국 무심의 바다로 가고 마는 인생이리라..
그리고 더러는 까만 아스팔트 위에서 부풀어오르는 열기에 분해되어 증발하는 빗물처럼 미증유의 삶을 살다 증발하고 말리라...
그래서 50대 이후의 삶은 그간의 오랜 경륜에도 불구하고 조급해지고 쉬이 무기력과 타협해버리는 것이리..
"사장님! 여기선 금연이예욧!!"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나온 걸까?
뺏어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모습을 나는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눈을 돌려야 했다.
큼지막하게 쓴 『금연』이란 문구가 벽에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오전에 아내에게 갔을 때 써 붙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순간순간 놀라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움과 순간 순간의 재치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녀가 계속 내 곁에 머문다면 쉽잖은 복덩이가 되리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와 얼굴 그리고 옷매무새까지 말끔해져 있었다.
그때 담배를 뺏어 끈 것이 미안했던지 내 곁으로 다가서서 수건으로 비에 젖어 있는 머리를 털어 주고 그녀의 서랍에서 꺼내어 온 빗으로 머릿결을 다듬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와선 가르마를 왼쪽으로도 해 보고 오른쪽으로도 해 보고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지 살피는 모습은 자못 진지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후다닥 껴안았다.
짐짓 놀랐으나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머릿결 내음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넌 참 나를 못 견디게 하는구나!"
"전 괜찮아요. 아빠가 조금이라도 젊어지신다면..."
"그래, 난 네 아빠야! 애인보다는 아빠가 되어야겠지...!"
나는 슬며시 그녀를 감았던 손을 풀었다.
그녀도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나는 그녀가 그대로 물러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무릎 위로 사뿐히 앉는 것이었다.
"아빠! 저 진짜 아빠 딸처럼 안아줘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그녀를 감았던 손을 풀 때 너무나 허전했다.
피가 섞이지도, 오랜 인연도 아니었으면서도 둘간에 우발적으로 설정한 윤리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던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두 다리를 벌린 사이로 그녀를 깊이 안아 들였다.
다행히 아래 그것도 껄떡댈 정도로 날뛰고 있지 않은 건 요행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기대어 오며 내 어깨에 뉘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늘 아빠가 있다면 이렇게 안기어도 보고.. 투정도 부려보고.. 그러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딸이 있다면 이렇게 안아도 보고.. 투정도 받아주고.. 그러고 싶었어!"
"저 너무너무 행복해요! 꼭 꿈만 같아요!"
"나도 그래! 너 같은 귀엽고 총명한 딸을 얻었으니..."
나는 그녀의 가슴을 꼭 껴안았다.
그녀의 볼이 내 볼을 비비어 왔다.
그러다 까칠한 턱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배와 가슴을 쓸어주다 브레지어를 안 했다는 걸 느꼈다.
아마도 샤워를 하며 젖은 걸 안쪽 어디에다 감추어 뒀으리...
"너 이거 안 했구나?"
"온통 젖어서 벗어 버렸어요. 나중에 치울게요!"
내 손이 그녀의 작은 가슴을 슬쩍 스쳤는데도 내 그건 별다른 요동을 않았다.
다행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여기에 대입해도 될 지는 앞으로 더 두고 볼일일 것이다.
그런데 젊은이답게 도전적인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시험하려 들었다.
"아빠 키스해 드릴까요?"
"키스는 무슨 키스..?"
"딸의 키스 말예요!"
내 마음이 들킨 듯하여 민망했다.
내민 내 볼에다 얼굴을 돌리며 뾰옥! 하고 찍었다.
아무튼 황홀했다.
진짜 딸에게 이런 키스를 받아도 그렇게 황홀하리라 생각되었다.
"선아?"
"네?"
그녀가 얼굴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요 만큼의 선을 넘지 말자! 요 만큼만 즐기고, 요 만큼만으로 만족하며 살자! 어쩌다 아빠가 그 선을 넘으려 해도 네가 막아줘야 한다. 알겠지??"
"네- 아빠!"
"나는 내 딸 선이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10년은 젊어진 거 같애. 더 이상 젊어진다면 나도 감당이 안돼! 아빠 나이가 내년이면 쉰이잖니!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럼 이제 일어서야지?"
"아이--, 이렇게 더 있고 싶은 데..??"
"앞으로 저기에다 네 방을 만들면 종일이라도 이럴 수 있을 텐데.. 뭘 그리 조급하니!"
"정말..??"
"그럼!!"
"빨리 일로 들어오게 해 줘요??"
"휴가는 다녀오고 나서.."
"안 되요. 그 전에 해줘요. 아빠 휴가가시는 동안 꾸며 놓을 거예요!"
"그럼 내일 당장부터 준비해 주지!"
"울 아빠 최고!!!"
볼에다 입술 세례를 퍼붓는 그녀를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소낙비가 멎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들뜬 기분으로 창문을 열어제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자재를 치울 창고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건물주가 전화를 받았다.
건물 뒤쪽 빈 창고를 내가 쓰면 안 되겠느냐 하니까 당장 월 30만원을 내라고 했다.
긴 실랑이 끝에 결국 25만으로 결정하고 내일 당장 쓰겠다고 하니까 그럼 지금 당장 기사를 통해 열쇠를 보내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니 모처럼 나타난 임자를 그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30분만에 그의 기사가 열쇠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임대차계약서도 보내어 왔다.
나는 도장을 찍어 한 장을 미스 정에게 보관하라 하고 한 장은 보냈다.
창고는 생각보다 컸다.
앞으로 저쪽 회사의 물량까지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안을 둘러보았다.
안을 깨끗했다.
물건을 놓을 선반이야 창고 크기에 맞추어 다시 짜야 할 테지만 별로 손 볼 것은 없었다.
내친 김에 선반을 짜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내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사무실 안의 창고 선반을 짠 친구라 물건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는 사무실로 올라와 견적을 뽑아 제시하며 요즘 경기 부진으로 휴가도 못 갈 처지라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네고(가격타협) 없이 그가 제시한 금액을 다 치를 테니 내일 당장 작업을 해달라고 하자 굽실하고 물러갔다.
그가 사라진 뒤 미스 정에게 커피 한잔을 타라고 시키자 그제야 생각난 듯 커피포트에 전원을 꼽자마자 전화기를 들었다.
미스 한에게 거는 전화리라..
둘이 주고받는 말로 보아 그녀도 그곳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말인 듯 했다.
전화를 끊고 타온 커피를 내 자리에 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언니도 그만 두려나 봐요!"
"왜?"
"2차를 자꾸 강요한대요!"
"2차가 뭔데?"
"그거 있잖아요? 남자와 잠자리 나가는 거...!"
모르는 채 묻는 말에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
"너도 그런 경험 있니?"
"아이, 아빠가 딸에게 그런 걸 다 묻다니...?"
"딸이니 묻는 거지!"
"그래도 그런 건..."
"알았다. 프라이버시다 이거지?"
"미워-잉!!"
그녀는 묘하게 빠져나갔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내가 요즘 그녀에게 너무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을 했다.
그녀를 사무실에 앉힌 것도 무리수였고, 창고를 비워 방으로 만든다는 것도 분명 무리수였다.
하지만 모처럼 얻은 행복(?)의 조건을 놓쳐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마음에 든다는 것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만약 그녀로 인하여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잃었던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건 하늘에서 내린 은총일 것이고, 그로 인한 대가는 기꺼이 치러야 하는 게 또 마땅한 도리가 아니던가?
그렇다. 나는 그 도리를, 그 은혜에의 보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작금의 나의 행위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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