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는 조석으로 풍향이 바뀌는 바람이어라!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혼란한 생각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아파트 안에 차를 댔을 때 뭐라 변명해야 할까 난감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키로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안에 고리는 걸려있지 않았다.
애들의 신발이 늘려 있는 걸로 보아 걔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문소리를 듣고 나온 작은놈이 꾸벅 인사를 했다.
"잘 놀았어?"
"예!"
"강우(큰애)는?"
"자요!"
"너도 들어가서 자!"
"네!"
나는 큰방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아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옷을 벗어 걸고 슬며시 침대로 올라갔다.
"샤워도 안 하고 올라와요?"
깜짝 놀랐다.
아직 잠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엉거주춤 걸어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아내가 눈치챈 게 확실했다.
여자들의 육감은 상상을 초월할 때가 많다.
아내는 그런 면에서 아주 예민한 부분이 있었다.
어쩐다..........?
아무 일이 없었다 한들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휴가지에서의 일이 있었긴 했지만 그건 충분한 교감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이거와는 달랐다.
더구나 50대를 바라보고 있는 제수씨에 비해 선이는 한참 물이 오를 아직 10대에 불과하므로 비교본능으로 볼 때도 시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 일 이후 아내가 성적으로 해방되었거나 초월했다고 믿기에는 도저히 힘든 일이었다.
칫솔로 입안을 마구 쑤셨지만 잇사이에 낀 오물이 빠져나가는 기분은 없었다.
샤워 콕을 최대로 틀어 고정시켜 놓고 그 아래에 섰지만 역시 몸에 낀 땀 찌꺼기가 다 씻겨내려 간다는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마냥 거기서 미적댈 수만도 없는 일이라 몸에 묻은 물을 대충 털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당신 술을 다 깨서 오신 거예요?"
어찌 알았을까?
그새 내 입에서 술내를 맡은 걸까?
언젠가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다 사고를 낸 적이 있었다.
깜박 졸다가 차가 길에 미끄러지며 전봇대를 박고 멈춰 섰다.
다행히도 그때가 설렁하던 겨울 새벽이라 지나가는 차가 없어서 큰 사고는 면했지만 나는 갈비뼈에 금이 가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몇 달간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두 집이 나란히 살고 있을 때여서 아내는 나를 수발하느라 병원에서 같이 살았고 집안 일은 제수씨가 도맡아 했다.
내가 퇴원하자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어 있었고 한동안 면허시험조차 자격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그 이후 두 여자는 음주운전이라면 진저리를 내게 된 것이다.
어쩜 오늘의 일도 그걸 이용하면 아내의 화를 덮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밖에 안 마셨는데 날씨가 더워선지 왜 그리도 취하든지...!"
"소주 한 병이 작아요? 핸들을 잡아야 할 시간에..."
"어찌 알았어? 당신 탐정 아냐?"
나의 좀 오버하는 비약적 발언이었다.
죄 지은 놈이 제 발 저린다고...
"그 애 너무 싸고도는 게 아니에요, 당신??"
"미스 정...?"
"그래요! 걔가 전화 왔습디다. 당신 술 취해서 주무신다고... 그 전화를 내가 받았기 망정이지 애들이 받았으면 무슨 망신예요?"
"미안해 여보! 밥을 먹다 술 생각이 나서..."
"술 생각이 아니라 설마 걔를 어쩌려고 그런 건 아니겠죠?"
따가운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버럭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걔를 귀여운 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믿어 줘, 여보?"
"아무튼 신문에 당신 신상이 모두 공개되고 파렴치한으로 몰리는 일은 나는 못 봐요! 그게 어디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불쌍하기 만한 어린것들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난 정말 걔를 어린 딸 정도로만 생각한다니까...?"
"주무세요! 나도 저녁 내내 애들 씻겨주고 안아주고 했더니 피곤해요..."
아내는 돌아누워 버렸다.
나는 거기서 자고 와서 그런지 밤새 뒤척여야 했다.
내 뒤척임에 아내도 잠을 설치는 거 같아 나는 살며시 빠져 나와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담배를 뽑아 무는데 책상 위에 몹시 구겨진 종이 한 장이 얹혀 있었다.
그건 아마도 세탁기에 들어가 물을 먹고 뒤늦게 꺼내어 말려 놓은 듯 했다.
펴 보았다.
"아빠 빨리 돌아오세요! 이 딸 선아가 몹시 외로워요. 보고싶어요. 무서워요. 빨리 돌아오실 거죠 아빠? 아빠! 아빠!!"
사무실 선이의 휴지통에서 주어 호주머니에 접어 넣었던 그 쪽지였다.
잉크 물이 번져 있었지만 볼펜 침이 지나갔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내도 빨래를 꺼내어 말리다 이걸 봤으리...
아내는 이걸 보며 뭘 생각했을까?
거침없이 '아빠'란 말을 몇 번이나 쓴 그 말에서 그녀는 뭘 느꼈을까?
분명한 것은 아내가 이 글을 보며 딸을 못 놓아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뒤늦게라도 양딸이라도 들여야겠다는 결심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필시 심한 질투심에 빠졌을 것이고, 이 글을 팍팍 찢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녀는 이걸 펴고 말려서 여기다 얹어 놓은 것일까?
그건 자기가 찢어버리는 거보다 더 효과적으로 분노와 경고를 보낼 수 있다도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등이 오싹해왔다.
여자들의 독기는 오뉴월 찬 서리를 내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리..
나는 그걸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그걸 완벽하게 없애려면 변기 속에 넣어 내려버리면 될 테지만 내가 찢었다는 걸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계가 온 듯 했다.
길게는 2주일 여, 짧게는 1주일 그녀와 벌여온 은근한 밀회(스킨십 정도가 고작였지만..)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주방으로 나와 전에 제수씨와 즐기다 남은 진(국산양주)과 얼음 물 한 컵을 들고 다시 서재로 왔다.
따가운 술이 목을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든 끝을 본다는 것은 성취감보다는 허무를 느끼게 하는 법이다.
더구나 이번처럼 중도에서 포기해야 할 그 끝은 좌절을 느끼게 한다.
아직도 익숙치 않는 그 좌절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술병이 비고 왠지 모를 허기를 얼음물로 채웠다.
그리고 퍽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위에는 이불이 덮어져 있었다.
날이 밝아져 있었지만 시간은 6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바깥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아내가 일어나 밥을 짓는 모양이었다.
애들도 방학인데 왜 저리도 설치는지...
그녀도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이때껏 살아오면서 각방을 쓴 일은 없었다.
아무리 격한 감정 싸움을 했어도 방밖으로 나가는 것은 부부간의 정도가 아니라고 외쳐온 나였다.
그런데 어쩌다 각 방에 자게 되어버린 꼴이다.
내게 이불을 덮어준 이는 분명히 아내였을 테지만 그녀는 내게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밤 나를 용서(이해가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했다고 믿었던 나는 다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일어나기를 주저하며 미적거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이제 저쪽 방에 가서 주무세요.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어요?"
나는 그녀에게 떼밀려 이불을 들고 큰방으로 건너왔다.
생각보다 아내가 화난 음성이 아니라는 데에 일단 안심을 했다.
다시 작은애가 나를 깨워 세수를 하고 식탁 앞에 앉았을 때 아내가 애들 앞에서 한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얘들아! 너희 동생 하나 생겼으면 좋겠지? 그것도 여동생이...??"
작은애인 강혁이는 대뜸 제 엄마의 배부터 내려다 봤다.
큰애 강우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 대 환영이에요! 엄마 언제쯤이야?"
강혁이가 좋아라 날뛰었다.
"넌 이 늙은 엄마가 꼭 배 아파하며 놓아야겠니?"
"그럼 벌써 아빠가 몰래 만들어 두었단 말이에요?"
가슴 뜨끔한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무사히 아이들을 설득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강우는 맏이다운 의젓한 말을 했다.
"자식은 엄마 아빠의 고유권한이 아닌가요? 전 두 분을 믿어요!"
쟤 엄마가 오래 전부터 양육원(고아원)에 자원봉사 다니는 걸 아는 그로선 거기서 한 아이를 데려올 것이라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아이인데요? 혹시 전에 데려온 그 애..?"
강혁이의 그 말은 그 아이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언젠가 아내가 양육원의 가정체험이라는 테마를 통해 한 애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워낙 고집도 세고 심술이 심하여 같이 놀아 주라 했던 혁이가 학을 떼던 아이가 있었다.
그는 걔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걔는 어린 아이였잖아. 얜 다 큰 애야! 너(강혁)보다 두 살 아래..."
"저는 두 분이 좀더 겪어보고 결정했으면 해요! 더구나 그 만큼 큰 애라면..."
"강우가 올바른 말을 하구나! 그래 그리 급한 문제는 아니니 너희들도 겪어보고 우리 다같이 결정하자구나!"
결국 내가 나서서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출근을 서두르는 내게 와이셔츠를 내어주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보니 강우가 어른이 다 된 거 같애? 당신 닮아서...?"
그녀는 히죽 웃었다.
칭찬이라 꺼낸 그 말은 아부라는 걸 아내도 알았으리라..
그래서 그렇게 멋쩍게 히죽 웃었을 것이다.
출근을 하는 내 마음은 생각만큼 그리 가볍지는 못했다.
"사장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던 그녀가 허리를 꾸벅하며 물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저쪽 회사(앞으로 B사라 하겠음, 충길 회사는 A사)에서 날아온 팩스가 놓여 있었다.
'계약체결서'였다.
회사 직인까지 찍힌 정식 계약서인 것이다.
나는 그 종이에다 입을 맞추었다.
"야! 이제 이 아빠도 정식으로 날개가 달린 거야!!"
나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는 갑작스런 내 행동에 품안에서 파닥거렸다.
큰 맹조(猛鳥)에게 잡힌 작은 새 마냥...
그녀의 이마에다 쪽! 하고 내려놓았다.
"저 안은 뭘로 쓰실 건가요?"
"글쎄? 넌 뭐로 썼으면 좋겠어?"
"휴게실..? 아니면 응접실..?"
"그런 말도 다 알아?"
"그럼요. 양육원에도 다 그런 건 있는 걸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자 정말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와도 마땅히 앉힐 곳이 없던 게 사실이었다.
나는 그 문을 열어 보았다.
지저분했던 그곳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창문도 활짝 열려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그녀가 아침 일찍 나와 이곳을 치우고 매캐한 자재들 냄새들도 빼내려 했던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계약서로 기분이 날아간 것 같은데 이런 귀여운 모습까지 보고 나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 이리로 들어와 봐!"
그녀는 내게 칭찬 받을 줄 미리 아는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너 어쩜 이리 귀여운 짓만 하니??"
"사장님이 몹시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녀의 이마와 볼에다 입술을 꾹꾹 눌렀다.
"이제 사장님이라 안 해도 돼!"
무슨 말인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내 모습이 들어가 있었다.
언제까지 저 눈망울에 빠져 있을 수 있을까?
내 모습은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은 아니었다.
당당한.. 아니, 당당하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넌 곧 정식으로 내 딸이 될 수 있을 것 같애! 오늘 아침 아줌마가 널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였으면 어떻겠냐고 말을 꺼냈어.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사모님께서..?"
"그래!"
"아이 아빠!!"
그녀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퍽퍽 울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가슴이 느껴지면서 혹여 내 앞섶이 닿을까봐 조용히 떼어냈다.
"그러나 아직이야! 모두 너를 지켜 볼 거야! 같은 가족으로서 손색이 없을지? 너는 총명하고 모난 데가 없어서 잘 하리라 믿어..!"
"저 잘할 게요? 아빠를 위해서라도..."
"그래 그래!!"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커피를 끓여 내 앞으로 미는 손이 떨고 있었다.
아마도 감동이 잘 사라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정보지에 사원 모집 광고를 내라고 그녀에게 시켰다.
그녀는 암담해 했다.
하긴 아직 그녀에겐 무리한 요구였다.
나는 잘 지켜보라며 전화를 들어 회사이름, 연락전화, 인원수 남 1명, 직책은 업무직이라 말하고 끊었다.
그녀는 다음에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내일부턴 아마 바쁠 것 같았다.
휴가들이 거의 끝나는 데다, 직원 채용, 그리고 납품 준비 등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아마도 오늘 B사로 들어가 계약서 원본도 받아오고 인사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어딜 가냐고 물었다.
출장 간다며 아마 저녁에나 돌아올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따라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왜 무서워서..?"
"네! 옆 사무실이 아직 휴가 중이라서..."
딴엔 그랬다.
같은 층에 사무실이 셋인데.. 맨 첫 사무실이 우리 사무실이고, 옆 사무실은 휴가 중이라 비어 있고, 저 안쪽 사무실엔 사람들이 있지만 복덕방이라 사람이 뜸한데다 낯선 이들이 드나드는 지라 그녀 혼자 두고 가기엔 안심이 안 되었다.
우린 더위에 맥을 못 추는 에어컨을 아예 끄고 창문을 내리고 달렸다.
푹푹 찌는 아스팔트에서 내뿜는 열기로 등이 젖었지만 그녀는 머리를 폴폴 날리며 마냥 신나 있었다.
B사가 자리한 곳은 바닷가라 그 앞에서 그녀에게 싱싱한 생선회나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난들 얼마나 신이 났을까?
한참 신나게 달리는 저 앞에 오토바이가 서 있어서 순간적으로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스팔트만큼이나 검은 선글라스 앞에 섰을 때 그가 내민 스피드건에는 112Km/m라는 수치가 찍혀 있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선생님! 그렇게 달리시면 어쩌시나..??"
내가 내민 면허증을 본 그는 다시 물었다.
"어디 피서라도 가시나 보죠?"
"아저씨! 한번만 봐 주세요? 우리 아빠 과속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바쁘다 보니..."
"따님과 데이트하실 리도 없고.. 뭔 급하신 일이라도..?"
그가 창문 안으로 스티커 뭉치를 통째로 내미는 걸로 커피 값이라도 주고 가라는 뜻인 듯 했다.
당찬 선이가 문을 열고 사정하려 나가는 사이 나는 잽싸게 그 밑으로 만원 짜리 하나를 꽂았다.
선이는 그의 팔을 붙들고 사정하고 있었다.
"아저씨! 다음부턴 과속 안 하실 거예요. 제발.."
"따님을 보아서 봐드립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가 거수 경례를 하고 물러나자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올라탔다.
"고맙다 얘야..!"
"저들은 피서도 안 가나봐요!"
"다 피서 가면 여긴 누가 지키나. 고맙게 생각해야지!"
"하긴요..."
"그리고 참, 너 앞으로 남 앞에서 너를 소개할 때는 '미스 정'이 아니라 '미스 진'으로 소개해야 한다?"
"알았어요!"
B사에 도착했을 때 11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차를 그늘 옆에 세워 그녀를 차에다 앉혀 두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김 과장은 마침 잘 왔다며 계약서 원본이 든 봉투를 내어주었다.
우편으로 붙이려 했다고 했다.
안을 기웃대는 내게 그는 이사님은 출장중이라 했다.
오늘 점심 어떻느냐고 묻자 대뜸 그러자고 나가서 기다리고 했다.
나는 차로 돌아와 선이를 뒤에다 앉히고 기다리다 그가 나와 옆자리에 앉자 곧 바로 해변을 달렸다.
나는 차에서 뒤의 아가씨는 내 딸로서 사무실에서 사무 일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딸이 참 예쁘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 수 더 떠서 "엄마를 닮았걸랑요!"라 했다.
지금 그녀는 '엄마'란 그 말을 '아빠'만큼이나 불러보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회가 나오기 전 찌개다시들이 나오고 술은 피차 할 수 없는 지라 음료수로 목을 축이는 데 그가 물었다.
"우리 이사님 사장님 친구의 5촌 당숙이라 했던가요?"
"아 예! 제 절친한 친구의.. 참, 김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A사의 김충길 차장..?"
"그럼요. 제 중학교 선배님이시죠."
그는 선배라는 말을 강조했다.
충길이에게 듣기로는 그는 과장 6년째로 이번에 차장 진급을 못하면 자동적으로 옷을 벗게 되리라 했다.
그래서 그 '선배'라는 걸 강조하고 인사권자의 후의를 은근히 기대하여 이번 일도 자신이 나서서 성사시켰으리라 여겨졌다.
"언제 우리 사무실로 놀러 한번 오세요? 그 때는 김 차장도 부를 테니 선후배간에 한잔합시다!"
"그럴게요!"
그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곧 회가 나왔다.
분위기로 보아 나중 회값도 자기가 치르겠다 할 것 같아 중간에 화장실 가는 척하며 나와 미리 계산을 했다.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나는 분명 그를 접대하려 불러낸 것인데 그가 날 접대해야 할 이유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선이에게도 과분할 정도로 친절했다.
자신의 명함까지 건네며 아빠를 많이 도와 드리라고..
그의 오후 시업 시간도 가까워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다며 일어서자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를 회사 앞에다 내려주고 우린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오늘 회 어떻더냐고 묻자 그런 집에서 처음 먹어봐서 맛도 모르고 먹었다고 했다.
솔직한 답이리라...
그녀와 나 둘만도 아닌 어려운 사람 앞이었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다음엔 일을 떠나 먹으러 오자고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5시가 넘어 있었다.
급한 것도 없고, 또 검은 선글라스를 볼지도 모를 일이고, 선이와의 오붓한 데이트를 좀 더 즐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이는 내내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고, 내가 부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서며 물었다.
"너,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아뇨!"
"아닌데 뭘?"
"사실은 아줌마하고 오빠들에게 어쩌면 잘 보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평소대로 하면 돼! 아빠도 도와줄 테니..."
나는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돌렸다.
"오늘 저녁에 애를 데려가 볼까?"
"당신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에요? 아직 작은애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듯 하던데...?"
"정이란 자꾸 부대껴야 생기는 거 아니겠어? 말 나온 김에 서둘렀으면 해!"
"그러다 일이라도 그르치면...?"
"우리 애들 그렇게도 못 믿어?"
"아무튼 알았어요. 내가 애들과 좀더 대화해 보고 전화 드릴게요!"
정말 내가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마음 한켠에는 그 서두름이 스스로 내 발목을 묶는 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저녁 내내 초조하게 아내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선이도 못내 기다렸는지 어둑해져오는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장님 그만 가요?"
아빠라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서며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빠! 저 아빠만으로도 행복해요. 더 많은 걸 주시려 노력하지 마세요! 저 사실은 두려워요!"
그 마음은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정말 가족이 된다면 그녀를 뺏기는 꼴이 아닐까 나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노리는 게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래로 꺾이는 계단의 중간에서 그녀를 돌려 세웠다.
그녀는 두려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쩜 간절한 표정 같기도 했다.
서서히 몸을 에워싸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 속 심연은 한없이 깊어져 있었다.
그 속에 빠지고 싶었다.
그녀는 그걸 감추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나는 와락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손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 심연의 늪에서 너울이 일고 있는 게 보였다.
아아- 가련한 것...
이를 어쩌나?
어찌 한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계단을 밟아 내렸다.
그녀를 차에 태운 나는 그녀 몰래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 올 때까지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하며 사라질 때에도 나는 손만 들어 보였다.
집에 들어섰을 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두 놈이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네들 엄마는 아직 안 왔니?"
"예! 병원에 들렀다 온댔어요!"
"병원에는 왜?"
"양육원 한 꼬마가 차에 치어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어요."
"그래서 너희들도 거기 앉아 빌기라도 하는 거야?"
"우리 집에 왔던 그 녀석이 그랬다 하기에...."
나는 그 놈들의 심정을 이해할만 했다.
샤워를 하고 안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며 그건 불길한 징조일지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
작은놈의 동정에 불을 붙일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큰놈이 들어와 저녁을 차려 놓았다는 말을 했다.
식탁 앞에서 나는 작은놈의 심정을 슬쩍 떠보았다.
"혁이 너, 공부 열심히 하니? 이제 기껏 4,5개월 뿐이야!"
"예!"
"대답이 시무룩한 걸 보니 요즘도 게임에만 빠져 있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얘 오늘도 코피 흘렸다고요!"
큰애가 싸고돌았다.
"그런 상황인데 아침 네 엄마는 쓸데없는 얘길 꺼냈나 보구나!"
"아빠 저도 반대는 안 해요! 다만 귀엽고 예쁜 동생이었으면 해요!"
"그래요 아버지, 우린 어른들 뜻에 무조건 따르기로 했어요!"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아침 이 자리에서는 얘들의 반대가 심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저녁 돌아온 자리에선 제발 반대 좀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다니.. 요즘 나의 마음은 조석으로 풍향이 바뀌는 바람이었다.
나는 몇 수저를 떠다 숟갈을 놓고 서재로 들어가 담배만 피워댔다.
아내는 열두 시가 가까워 들어왔다.
아내의 표정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어찌 되었어?"
"간신히 고비는 넘겼지만 났어도 다리는 못 쓸 거 같아요!"
"심하게 다친 거 갔구나!"
"차라리 그 불쌍한 앨 데려오면 어때요?"
하도 뜻밖이라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좋다고 할 수도 없고,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그 말은 취소할게요. 당신뿐만 아니라 애들을 설득하기는 더 힘들 테니까요!"
아내가 너무 빨리 말을 거두어 버리자 그런 아내를 넘어 선이를 내게 묶어두려는 건 허망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걔의 치료비는 내가 부담하고 싶어요! 당신 도와주실 거죠?"
"얼마나 드는 데...?"
"다 도와줄 수는 없어요! 우리 형편도 있으니.."
걔를 향한 아내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표현인 듯했다.
자원봉사를 다니면서 아내가 얻은 게 있다면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아내는 단번에 안겨왔다.
그러나 내 손이 밑으로 파고들자 손을 막았다.
"오늘 그날이에요! 입으로 해드릴까요?"
"됐어! 이렇게 자자!"
"내일 윤영이와 저녁이나 하세요? 오늘 첫날이니까 아마 사흘은 힘들 거예요.."
정말 아내는 그날 이후 性의 벽을 넘어선 걸까?
나는 아내의 젖꼭지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도 아쉬운 지 손을 밑으로 내렸다.
"오늘 윤영이도 왔더군요. 충길씨 아직도 완전하질 못한가봐요. 그때 내게는 안 그랬거든요."
"제수씨 바램이 너무 커서가 아닐까?"
"그럴 지도 모르죠. 아무튼 윤영이 실망이 큰 모양이었어요. 당신이 좀 달래주세요?"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내의 젖꼭지를 놓았다.
그녀도 손을 거두어 갔다.
부부간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까지이며, 서로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놓을 수 있는 범위 또한 어디까지인지 가름하기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내는 비교적 많은 부분을 드러내어 보인 꼴이고, 나는 숨기는 게 더 많은 편이라 해야 할 것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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